날짜:1월30일(일) 9명
(북한산 유래에 대하여 펌)
서울 강북 수도권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북한산.
우이동에서 도선사 경유해 30분 거리에 인수산장.
인수봉 안부인 인수산장 주변엔 21 야영장이 있다.
인수봉은 100 여 바윗길이 있는 산악인의 요람이다.
현재 북한산에 산장은 백운산장과 인수산장 두곳 뿐.
백운산장은 위문 아래, 인수산장은 인수봉 아래 위치.
무인 산장으로는 북한산 대피소가 용암문 인근에 있다.
수도권에서 대중 교통으로 접근이 쉬운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 삼각산은 백운대,인수봉, 만경대(국망봉)에서 비롯.
세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백운대는 해발 836.5m로 넓은 정상
사방이 탁 틔여 전망이 넓고, 많은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곳.
백운대 동북쪽으로는 도봉산의 연봉들과 강북 도봉, 노원구
남쪽으로는 한강 건너편에 뻗어나간 남한산을 바라볼 수 있고
서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눈에 보이고 강남 도시 전경이 보인다.
북서쪽으로는 맑은 날씨에 시야가 트이면 인천 앞바다가 보인다.
북쪽으로는 38선에 가로 막힌 개성의 송악산이 아스라히 보인다.
추석 달맞이 풍습이 있는 백운대 정상은 주말에 등산객으로 붐빈다.
백운대의 야경은 밤하늘의 별빛과 서울의 야경이 어울려 환상적이다.
백운대와 마주보는 동쪽으로 바위봉 하나 우뚝 솟은 곳이 '인수봉'.
마치, 거대한 남근이 우뚝 솟아오른 듯, 바라만 보아도 가슴 설렌다.
그러나, 접근조차 허용 않을 만큼 도도한 자태가 여성스러운 곳이다.
하여, 처녀이든 총각이든 인수봉의 매력에 빠지면, 혼기 놓치기 십상.
인수봉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동시에 갖춘 양성적인 면모의 산세.
서툰 오름짓으로 정상을 탐내면 거칠게 밀어내어 뼈도 추리기 어렵다.
인수봉은 해마다 암벽등반 중 안전사고로 꽃 같은 청춘들이 숨지는 곳.
그 숨진 넋을 달래는 비문이 가득한 북망산이 인수봉 북쪽의 영봉.
지금은 그곳에 몇 개의 비 만 외롭게 남아있고 대부분 철거되었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 편의 시집을 읽는 듯 비문이 많았다.
인수봉에서 인수산장을 잇는 능선도 비문이 많아.. 일명 '비문 능선'.
백운대 동남쪽 국망봉(만경대)은 무학이 한양을 도읍지를 정한 장소.
무학이 한양 도읍을 정하기 전 만경대에서 내려보았다 하여..국망봉.
새 나라의 도읍터를 바라 보는 위치에 있어 국망봉이라는 유래가 있다.
만경대 정상에는 쪽두리같은 형태의 둘로 갈라진 바위라 애칭 '족두리봉'
족두리는 신부가 폐백할 때 입는 예복 원삼과 같이 착용.
원나라와 혼인이 빈번하던 고려 말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
양반은 의식 때 예복 차림에 족두리를 써 남편 관직을 표시.
족두리는 남편에게 몸을 허락하는 첫날밤 의식에서도 사용.
몽골에서는 남자가 처녀의 모자 뿔을 만지면 결혼해야 한다.
족두리는 여성의 정절을 의미하므로 함부로 만지면 큰일난다.
처녀 족두리를 실수로 만진 남자라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즉, 족두리봉이란 이름은 잘못 오르면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책임질 자신 없으면, 접근도 말라는 이름이 '족두리봉'.
'족두리 봉' 이름은 곧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 하는 곳.'
여성에 관련된 지명은 전국 어디를 가도 위험한 산세.
하여, 족두리 봉이라 별칭 붙은 곳은 대부분 위험한 곳이다.
만경대 역시 북한산에서 가장 안전사고가 높은 바윗길이다.
도선사를 병풍처럼 둘러 싼 병풍암 능선 역시 안전사고 구간.
만경대와 병풍암을 잇는 능선은 출입금지 사고다발 지역이다.
북한산 일대의 지질 기반은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담조색은 오랜 세월에 걸친 지반 상승과 풍화 작용.
북한산은 높이에 비해 산세가 험하고 급경사 암벽으로 된 바위 봉우리들로 형성.
현재 북한산성 외곽둘레는 12.7km이고 성안의 면적은 약 200 만평
1990년부터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동장대의 성곽들을 보수.
북한산성은 외곽성문이 12개, 수문을 관장하는 중성문은 3개로 축성.
현재, 중성문 2개는 남아있고, 하나는 개울을 가로 지르는 터만 남았다.
외곽 성문은 정문인 대서문-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대남문
-대성문-보국문-대동문-용암문-위문-북문-서암문에서 대서문으로 연결.
12성문으로 둘러싸인 암봉을 이어 종주하는 것을 '12 성문 올 릿지'라 한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岳)이다.
암봉이 아이를 업은 형태와 같아 붙여진 이름.
또는 세 봉이 뿔같아 (부아 →불→뿔) 붙은 이름.
삼국시대에 부아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
고려 성종 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은 삼각산
조선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산(華嶽山)으로 불렸다.
1711년 조선 중기의 숙종이 축조한 북한산성
남한산성과 대비해 '한수 북쪽의 성' 이란 의미.
하여, 190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북한산.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경 고구려 동명성왕의 두 아들.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건국할 때 한수 지역을 도읍지으로 물색 중.
부아악에 올랐다고 하며, 백제의 개루왕이 서기132년 산성을 축조.
삼국시대 전략요충지 부아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여러차례 격전
557년 통일신라 진흥왕이 비봉에 순수비를 세우고, '북한산주' 설치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이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란 지명.
원효봉과 의상봉은 대서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이는 위치이다.
원효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고, 이어서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
고려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 8대 현종이 북한산에서 한때 승려 생활.
이때 진관 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
거란족이 침입했을 당시에 북한산성의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1109년(고려 예종) 탄연이 문수사를 창건,현재 대남문 옆에 있는 사찰이다.
문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 이후 결심하고 미국 망명 직전에 찾은 곳.
문수사는 어머니 백일기도로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유래가 있던 곳.
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이지만 어머니를 그리며.. 이곳을 찾았단다.
고려 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새로 지었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이름을 지었다는.. '잠구시'.
"손으로 넝쿨 휘어 잡으며 푸른 봉우리로 올라가니
백운 가운데 암자하나 높이도 자리 잡고 있네,
눈에 보이는 곳 다 가져다 우리 땅 삼는다면
오월의 강남 땅 어이 받아들이지 못하리."
이 성계가 읊은 싯귀 중에서 '백운'을 따서 붙여진 지명이 '백운대'.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서 구도를 논의 했다 하여 '국망봉'
'인자요산, 인자수'의 뜻을 따서 붙인 지명이 백운대 동쪽 '인수봉.'
훗날, 국망봉이 만경대가 된 이유는 전망이 좋은 곳이기 때문인 듯.
만경대 능선 아래로 구름바다가 흐르면, 만경대는 뱃머리와 같은 곳.
구름바다에 잠겨 섬같은 북한산 봉우리들 사이로 떠가는, 거대한 배.
"만경 창파 풍랑 헤치고 노젓는 뱃사공" 뱃노래가 절로 나오는 '만경대'.
보현봉은 수양대군(세조)이 천문 관측을 위해 올랐고,
그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 지리, 학문 정진, 수도
구기동에서 오르면 대남문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 이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군에 한양이 10일 만에 점령 당하고
피난처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한 역사, 삼전도 수모
수많은 부녀자가 청에 불모로 잡혀가 속전을 물고야 돌아온 환향녀.
그 환향녀가 오늘날 우리말에서 '화냥년'의 어원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후 왕의 피난처가 절실해 숙종이 1711년 북한산성 축조.
단 6개월만에 7,620보, 8.5㎞에 이르는 북한산성 축성 완공.
남한산성과 대칭되는 이름인 북한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북한산이란 지명의 유래도 북한산성에서 유래되었다.
숙종 때 단 6개월만에 북한산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숙종은 청태종에게 삼전도의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남한산성에서 맨발로 나와서 청태종에게 항복.
삼전도에서 무릎꿇고 세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기.
'그것도 숙종이 이마를 땅에 부딪쳐 피가 흐를만큼.'
그것은 청나라에 항복한 패전국의 임금이 치루는 관행.
청태종은 숙종 이마 찧는 소리를 들으며 옆신하와 농담
숙종은 삼전도의 수모를 결단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태종은 숙종에게 북쪽을 향해 성을 쌓지 말라 했다.
그러나, 청태종에게 당한 수모를 잊을 수 없었던 숙종.
암암리에 북벌을 감행하려고 북한산성을 쌓았던 듯 싶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명명했던, 북한산.'
북한산(北漢山)은 북의 한족을 잊지 말자는 뜻 지명.
한(漢)은 95% 한족으로 구성된 당시 청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북한산은 청태종에게 맺힌 한이 서린 이름이다.
1713년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많았기에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음.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 시의 화재로 성곽, 사찰들이 크게 훼손.
일제시대 일본 헌병대가 주둔해, 북한산 거점 독립운동을 차단.
북한산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고, 1927년 백운대에 쇠난간을 설치.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했는데, 1980년대 거의 다 철거했다.
광화문을 막아선 자리에 위치한 구 중앙청 터는 일제 때 조선 총독부.
그 뒤에 경복궁이 있고 그 뒤 현재 청와대가 일제 때 조선총독 관사 터.
그 청와대 뒤뜰 북악산이 용의 머리이고 북한산 도봉산은 용의 몸통이다.
북악산 용머리 두 눈은 용의 혜안으로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는 의미.
북악산 용의 눈은 인사동을 바라보며
관악산과 마주하여 남산을 내려다본다.
하여, 이조는 왕의 얼굴을 용안이라 한다.
경복궁은 구한말 전기가 최초로 가설된 곳.
그곳 경회루는 연산군 흥청망청 유래의 터.
훗날 33 수도 경비 연대가 청와대를 지킨 곳.
그 옆 궁정동은 박대통령이 최후를 맞이한 곳.
북한산은 이조의 폭군 연산군의 사냥터였다.
30리 안에 민가를 철거 한, 북한산이 현재 모습.
1983년 4월에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위치.
현재 북한산 국립공원은 총 넓이 78.45 ㎢로 북한산과 도봉산 포함.
북한산 인수봉, 만경대, 백운대, 노적봉, 보현봉, 비봉, 원효봉 등등
도봉산엔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오봉 등 20여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99.5m)이 3 주봉.
노적봉(716m), 문수봉(715.7m), 보현봉(700m), 영봉(604m), 비봉(560m),
형제봉(462m) 수리봉, 원효봉,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삼지봉 승가봉 등등 헤일 수 없이 많은 봉우리마다 전설과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북한산 일대는 도시로 둘러싸여 생태적으로 고립된 섬이지만 녹색허파
수도권 및 서울주민들의 자연 휴식처로 탐방객은 연간 500만에 이른다.
단위 면적 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 북에 기록.
자연휴식년제 구간, 산불조심기간 중 통제구간, 수많은 샛길, 안전사고,
위험지역 등등 출입금지 구역에 대한 탐방객들의 주의가 절대 필요하다.
현재,300 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고 2천년 역사가 담겨있는 유적지
100 여개의 사찰과 암자가 곳곳에 있어 다양한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
공원시설 : 일반 야영장 3인 이하 소형 텐트부터 10인 이상 대형 텐트 가능
종주코스
1) 우이동-우이산장-백운대-대동문-구기동 (9.1km)
2) 정릉-보국문-용암샘터-노적봉-백운대 (8.5km)
횡단코스
1) 우이동-백운산장-위문-대서문 (6.5km)
2) 도봉동-포대능선-오봉-우이동 (8.5km)
3) 도봉동-도봉산장-관음암-우이동 (7.9km)
4) 도봉동-관음암-오봉-우이동 (8.3km)
5) 북한산성 입구-대서문-위문-백운대-우이산장 (11km)
6) 구기동-대남문-대성문-북한산장-백운대-우이산장(9.5km)
순환코스
1) 우이동-백운대-북한산장-정능 (7.1km)
2) 우이동-북한산장-백운대-우이동 (8.1km)
3) 우이동-도선사-백운산장-백운대-노적봉-용암문-우이동 (6.3km)
4) 구기동-대성문-대동문-4.19탑 (5km)
5) 세검정-문수암-대남문-보국문-정릉유원지 (7.5km)
6) 도봉동-천축사-망월사-장수원 (6.7km)
종점에서 올려다 보니 ..
인수 산장..
추모비의 내용을 보면... 젊은 목숨을 자유와 바꾼 두 용사의 넋이 여기 잠자로라!
1950년 6월28일 백운암을 거쳐 후퇴하던 장교1명과 사병1명이 이곳에 남아 사태를 지켜보던 중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2명 모두 자결하였다. 이에 두 용사의 우국충성을 길이 빛내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정상에서 인증 샷
산행이 끝나고 인사동 골목길 한 식당에서 뒷 풀이....
삼합과 해물전 맛이 입안에서 그야말로 살살 녹는데..
일단 해물전 2접시 동동주 병개 소주1병 회장님이 가지고 오신 포도주 1병과 삼합한접시 시켜보는데
9명의 양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것 같지만 양을 채우기엔 부담감이 들어 그걸로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중년들끼리 앉아서 과거를 되 씹어 가면서 화기애한 분위기속에 1차는 그렇게 간단히 먹고
종로3가까지 걷기로 하였다. 시장 골목길을 돌다 오랜만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장집에 들렸다.
얼마만인가...왕 순대, 떡뽂기,돼지껍질,미니 김밥.그리고 전등불..적당히 때 묻은 낡은 그릇이 오히려 정겨운 풍경
홀로 앉은 중년남자.곁에 우르르 앉아 이것저것 시켰지만 이미 먹은탓인지 아님 입이 고급.?
더 이상 기름끼 음식이 들어가지 않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특이한 옷 차림에 섹소폰을 든 노인 한분이 왔다갔다 하시더니.
어느 순간 우리곁에 서서 연주를 하시게 되었다.
장사하시는 아주머니 하시는 말씀이 이곳 시장에 명물이시라고 티브에도 나왔었다고 하시는데
일행 중 서울 사는 여성한분도 티브이에서 진짜 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그 자리에서 3곡의 연주를 해 주시며 시장 분위기를 살리신다.
우리 일행 중 한분이 쌈짓 돈 쥐여주며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라고 박수를 쳐 드린다.
그 밖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던 분 알고보니 우리와 갑장이라고 그 분은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모습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여성분들만 가지라고 깜찍한 사프연필 하나씩 갑자기 선물을 받았다
시장골목은 우연히 낯 모르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왜 일까..?
뭔지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그냥 느낌이라고 해 두자..
어떤 격식과 가식이 없으면서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는 그런 편한 느낌들이라고 할까.
어둠이 내리고 이제 떠나온 제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분양받은 강아지가 너무나 귀엽고 이쁘다고 집에서 전화는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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