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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내가 삽니다.

북벽 2013. 11. 4. 18:05

 

 

그러기에 내가 삽니다

새벽에 깨면 일어나 뱃속을 비운다
비어있는 뱃속에 한 잔의 차를 담는다

비어있는 밥공기에 밥을 채워 입의 비어있는
공간을 경유해 위의 비어있는 부분에 쌓는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것도 허공을
가르며 차를 빨리 달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비어있기에 가능하다

땅이 좁다면 빈 하늘을 보고 마음을 넓혀라
그리고 빈 가슴에 찾아 드는 님을 기억하라
비어있음은 삶의 중심입니다

새벽에 깨면 일어나
밥솥에 밥이 익기를 기다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윗층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언제나 나의 차 좌석 외에도 비어있는 자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

신호등은 내가 기다림으로서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배려의 등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님을 기다림보다
더 오래 버스를 기다린다

우리들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늘 기다린다
기다림은 삶의 중심입니다

비워도 비워도 다 비우지 못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공허함이 남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또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기다리지 않아도 곧 또 기다릴 일이 생깁니다

그러기에 내가 삽니다



-좋은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