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사자바위의 성채 시기리야
스리랑카◇시기리야의 고대도시=신할라 왕조의 제65대 왕인 카사파 1세(재위 473∼491)가
만든 시기리야의 성채도시는 이상한 모양으로 하늘 높이 우뚝 솟은 200m의 바위산 정상에
있다. 사자 모양의 성문 유적에 남아 있는 거대한 발의 앞부분과 암벽에 그려진 500명의
천상계 여인의 모습이 옛 영화(榮華)를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다. 바위산 아래에는 아시아
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과 담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시가지 유적이 펼쳐지는데,
기하학적이고도 아름다운 ‘물의 정원’ 유적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시기리야의 고대도시를 건설한 카사파 1세는
왕족 혈통을 가진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우려해, 아버지 다투세나
왕을 가두고 왕위를 차지한다. 분노한 동생이 인도로 망명한 뒤 권력욕에 눈이 먼
카샤파는 부하를 시켜 아버지를 살해한다.
5세기에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늘 괴로워하는
한편 추방한 남동생 모갈라나가 반격해올까봐 늘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왕은
절벽으로 된 바위산 시기리야에 수비가 튼튼한 성채 도시를 구축하고 그 곳으로
도시를 옮겨 왕위를 지키려고 했다.
바위산 밑 계단을 사이에 두고 사자의 거대한 두 발이 버티고 있는 광장에 이른다.
지금은 사자의 발만 남아 있으나 , 처음에는 사자의 다리와 머리모양까지 완벽해
왕구에 오를때면 마치 사자에게 삼켜지는 듯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사자의 머리와 갈기를 표현하기 위해 촘촘히 벽돌을 박았던 흔적이 절벽에 남아 있다.
시기리야라는 이름도 싱하(사자)기리야(목구멍)에서 유래했다.
바위산 밑으로 다가서면 누구나 수직 절벽 바위산에 압도당하게 된다. 하필이면 저
까마득한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이 바위산엔 광기와 피로 얼룩진 왕조사가 서려 있다.
시기리야 유적 감상의 압권은 거울 회랑에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수직으로 올라 만나는
미인도 벽화다. 젖가슴을 내놓은 여성을 중심으로 주위에서 화려한 장식과 옷을 갖춰입은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인데, 거의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또렷한 선과 선명한 색채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주인공은 천국의 요정 압살라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본디 시기리야 바위산 둘레엔
500명의 미인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남아 있다.
카샤파왕이 11년 동안 이 바위산에서 지내는 동안, 참회의 심정으로 아버지를
위해 제작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카샤파는 이후 7년 동안 시기리야 바위산에 왕궁을 건설하고 스스로 갇혀 살게 된다. 동생의 보복이 두려웠을까, 뒤늦은 참회의 심정 때문이었을까.
1.6ha 넓이의 바위산 꼭대기엔 웅장했을 옛 위용을 더듬어볼 수 있는 왕궁 건물터와
저수지·정원·연회장터 등과 이들을 잇는 비좁은 계단길, 카샤파왕이 앉아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대리석 의자 따위가 남아 천년을 불어온 바람에 쓸리고 있다.
그러나 시기리야의 종말은 머지 않아 찾아왔다. 491년 마침내 왕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모갈라나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카사파 1세는 너무도 쉽게 패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198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
Corry Konings & Vader Abraham - Adios mijn v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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