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불러도 눈물 나는 이름, 어머니.
어버이 날, 5월 8일. 내겐 카네이션 달아 드릴 부모님이 지금 이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작년, 하늘 나라로 가셨기 때문이다. 매년 달려가서 속죄 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카네이션 한송이 달아 드렸는데----. 이젠 그나마 해들릴수가 없다.
충주로 핸들을 돌렸다, 산소에라도 다녀 와야 마음이 편할것 같기에---.
충주 가는길, 햇살이 맑다 못해 이젠 여름 날씨처럼 덥다. 자주 다니던 길이 부모님 돌아 가시고 나자 좀 뜸해진게 사실이다.
차창을 열자 초록 향기와 함께 아카시아 꽃 내음이 차안 가득 들어 온다. 길옆, 산 자락 아카사아 나무에서 뿜어내는 천연의 향기, 속도를 줄여 그 향기를 듬뿍 담는다.향긋하다. 신선 하다. 얼마나 많은 향기를 간직 했기에 이 골짜기를 넘쳐낼까?
저 멀리 벌통도 보인다. 아카시아 꿀을 채집 하시는 양봉가 들이 설치 한 모양이다. 트럭에 벌통을 싣고, 남녘 부터 북녘 휴전선 까지 아카시아 꽃을 따라 옮겨 다니 신단다, 이름 하여 아카시아 꿀이다. 조금 후면 밤 꽃도 핀단다. 그러면 그것은 밤꿀이 되겠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 달려온 길, 벌써 충주에 다다랐다. 꽃집에 들렸다,가슴에 다는 카네이션 보다 화분에 담겨진 카네이션을 산다.붉은 패랭이꽃도 같이 있는 프라스틱 화분이다. 물을 뜸뿍 먹여 차에 싣고 술 한병, 포 하나 같이 사서 부모님 계신 산소로 향한다.
농촌마을 풍경.
내가 낳고 자란 곳이다.단지 변한게 있다면 우마차 다니던 비 포장길이 지금은 까맣게 아스콘으로 포장되고, 구불 구불 곡선의 미가 아름답던 전답이 이젠 경지 정리로 반듯 반듯 해졌다는것과 소가 끌던 쟁기 대신 경운기와 트랙터가 논과 밭을 갈고 있다는것 뿐이다.
검은 비닐이 씌어진 밭고랑에는 고추와 담배가 심겨져 있었다. 이곳 충주는 잎 담배 주산지다.우리도 아버지께서 근 50년을 담배 농사를 지으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담배 농사는 1년내내 준비부터 재배,건조, 판매까지 노동집약적 일이다. 벌써 푸릇 푸릇 제 모양을 내며 자라고 있었고, 고추는 심겨진지 얼마되지 않는 듯 가녀린 모습으로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너무나 내겐 익숙한 고향마을. 이길을 따라 걸어서, 때론 자전거로, 비 올땐 시내버스로 학교에 다니던 길. 지금 그 길위를 지나 간다.
동구밖 느티나무는 지금도 고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나이테에 고향의 역사를 기록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고,성장하고, 또 삶을 잃어버리는 일 까지. 말을 못해 그렇지 모두를 감싸안고 있으리라.
어릴때 오르내리던 그 나무가지.무척 높아 보였는데---. 연륜이쌓인 지금 키 보다는 굵어진 모습이다. 그 아래 그늘은 연세드신 분들의 놀이방이자 쉼터가 되였다.
누가 버린것을 주워다 놓았는지 푹신한 쇼파 부터 안락의자까지 자리 잡았다.느티나무 밑은 그렇게 시원 할수가 없다. 무성한 잎새로 만들어진 그늘,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은 한 여름 더위를 이겨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기 부모님 산소가 보인다. 발에 힘을 준다. 얼른 달려가서 인사 드리고 싶어서다.
산에 오르는 길, 떡갈 나무 초록 잎새가 그렇게 싱그러울수가 없다.깨끗 하다. 부모님 장례때 만들어진 새 산길에도 초록이 삐쭉, 삐쭉, 새모습을 내밀었다. 앞쪽 냇가엔 가뭄인데도 물이 흐른다. 이곳은 대전보다 많은 비가 내린걸까?
새소리가 고요한 산속의 적막을 깬다.꾀꼴이 소리다. 가슴에 노란 털이 예쁜, 아름다운새다. 꿩도 푸드득 날아 오르고, 까치는 이방인의 방문을 경계하는듯 까악-까악 소리 내며 주변을 맴돈다.
누가 나보다 먼저 왔다 갔나 보다.조카가 다녀 갔을까? 아니면 막내일까? 카네이션 바구니가 묘소앞에 놓여 있다.
우선 술 한잔 따르고, 절을 올린다.잘 계셨냐고 인사드린다. 마음은 울쩍 하고 가슴은 이내 서글퍼진다.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늘 부족 했던 자신을 채찍 해 보지만 부모님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효도 하려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않는다라는 글귀가 머리를 스친다.불효자식의 때 늦은 후회다.
술 잔을 묘소에 부어 드린다,아버님은 술을 무척 좋아 하셨다. 그 술 때문인지 어머님은 술을 한잔도 못 하셨다. 아니 안 하신것 같다. 아버님 술 주정을 혼자 다 받아 들이셨으니까-----.
그리고 준비 해온 카네이션을 프라스틱 화분을 빼고 두분의 묘소앞에 흙을 파고 예쁘게 심어 드렸다.그래도 꽃 보다는 오래 가리라고 생각을 하면서----.
묘소 주변을 돌아보며 아직 제자리 잡지 못한 잔디를 밟아준다. 묘소 바로 앞 과수원 사과나무도 푸르게 잎을 키워 가고 있었다. 잠시 그늘에서 옛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지난날을 되돌아 본다.
참 어려웠던 시절. 아니 너무 가난 했던 시절, 가족은 많고, 생계는 어렵고, 아이들 교육은 시켜야 했고--- 농촌에서 돈 되는 것은 없고, 할수 있는 일은 오직 노동이였다. 어머님은 장날 마다 채소, 무우, 고추,파등 돈 될수 있는 것은 모두 머리에 이시고 먼거리를 걸어 다니셨다.
돈 아까워 장에서 식사도 못 하시고, 늦게 집에 오셔서 찬밥으로 끼니를 해결 하셨다. 그 기억이 내머리에 아직도 생생 하다. 그런 삶을 내 부모님은 살다 가셨다.몸이 아파도 약도 제대로 사드시지 않고 몸으로 이겨 내셨다. 그러나 자식을 위한 사랑엔 아낌이 없으셨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힘들지만 다 해주려 하셨다.
이제 그런 자식들에게서 효도를 받으며 편히 사셔야 하는데 굳어진 몸은 늘 아프기만 하시다가 끝내 작년에 하늘 나라로 가셨다.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늘 언제 불러도 눈물 나는 이름. 그 이름은 어버이 뿐이다.일년에 어버이날 하루 만이라도 살아 계실때 편 하게 해 드렸어야 하는데---. 이젠 이렇게 차디찬 묘소에서만 뵙게 되였다.지난 세월의 모습이 내 머리속에서 필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때론 아쉼고, 후회되기도 하고 ,하지만 평생 영생 할수 없는게 인생이기에 그저 편히 잠드시기를 기원도 했다.
이제 다시 이곳을 떠나냐 한다.가야 한다. 자주 들리겠다고 말없는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고개 숙여 인사 드린다. 안녕히 계십시요, 또 오겠습니다.몇번이나 돌아보며 인사 드렸다.
되돌아 오는길,
지루 하지않다. 막혀도 짜증 나지 않는다.할일를 다 하고 온 그런 기분좋은 마음이다.. 왜일까? 부모님을 뵈고 왔기 때문인가 보다.참 마음이 편하다. 대전에서 단지 산소에 들리기위해 왔을 뿐이지만 소요된 시간이 아깝지 않다.그것으로 효를 다 할 수는 없지만---.그래도 마음 편하다.
언제 불러도 눈물 나는 이름,--어머니. 언제까지도 잊혀질수없는 이름,---어머니. 사진이없어도 그 모습 그대로 내 마음속에 살아계신 어머니. 모든이에게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자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된다.
힘들땐 언제나 부르던 어머님, 그러면 걱정하지말라고 늘 대답 해주시던 어머니. 그 사랑 간직 하며 나도 내 자식에게 희망의 등불이 될수 있도록 꿈과 용기를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5월8일 , 어버이날, 어찌 하루 뿐이겠는가-- 365일, 늘 어버이날이여도 부족할텐데---.
어제 아침, 조선일보 1면 톱기사가 눈에 들어 온다. 57세 문학소녀, 장 영희 교수(서강대)가 별세 하기 며칠전 엄마에게 쓴 편지내용 때문이다.
"엄마 미안 해 이렇게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빠 찾고 있을게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월간 샘터에 정기적으로, 조선일보에 "문학의 숲" 이란 글을 장기간 연제 했던 수필가 겸 서강대 영문과 교수. 소아마비로 목발에 평생을 의존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암과의 긴 투쟁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입지적인 교수님 이셨다.
그분도 마지막 가시면서 어머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잊지 않으셨단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도 엄마 였다고 오빠는 전해 주셨단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사랑. 그 깊이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 자신 만이 아시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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