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첫 제사를 맞으며---.
참 세월 빠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입원해 계셨지만, 갑작스럽게
중환자실로 옮겨지셨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시기 전날 제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었습니다.
주로 제가 전화를 자주 드렸기에 전화가 걸려오는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님이 "내다, 너 언제 올수 있니-----" 하시면서
말씀이 흐려지셨습니다. 그게 저녁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큰 소리로 간병인을 바꾸어 달라고
말씀드리자 간병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일 오전 11시 이전까지 가겠다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사람이 직감이라는게 있는 모양입니다
"아-- 어려우신 모양이구나" 하고 다음날 아침 서둘러 충주로 향했습니다
며칠전부터 담당의사는 어렵다고 수차례 저에게 말슴도 하시고, 전화도 주셨습니다.
준비를 미리 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내 고향 충주 댐 유람선)
간호사로부터 밤 11시경 다급한 목소리로 연락이 닿아 밤중에
충주에 가기를 3번이나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시다가 제가 도착하면 다시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시면서 평온을 찾곤하셨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한 며칠 후 아버님은 중환자실에서 끝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말씀은 못하시고 흐려지는 눈동자로 제게 간곡한 부탁을 하는것을
저는 직감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귀에 입을 대고 큰 소리로 말씀드렸습니다.
"잘 모실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요." 라고 말씀 드렸더니 표정이 온화해
지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혼수상태에 빠져 그날밤 늦게 영면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은 90세 연세로 이 세상과 이별을 하셨습니다. 남들은 모두 90세 연세시면
호상이라고 말씀들을 하셨지만 제겐 그러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웠던 세월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여의시고 홀로 어렵게 자수성가 하신
분입니다. 5남 3녀의 자식을 두었고, 지금은 손자 손녀는 물론 증손자, 손녀까지 합치면
40여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곡하게 잘 모시라는 어머님도 아버님이 떠나 가신후
꼭 40일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주변 모든 어르신들은 부부금실이 좋아 너의 아버지가
어머님을 모셔 갔다고 좋은 뜻으로 말씀하셨지만 저는 늘 죄를 지은것 같은 망상에서 벗어
날 수 가 없었습니다 .
아버님의 간곡한 부탁 말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분을 같이 모셨습니다
자주 산소에 찾아 인사 드리지만 그게 효(孝)는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 형제자매가 어릴적 당시, 시골 농촌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했습니다.
모두가 천수답에 의존하는 농사가 전부였지요
하지만, 그 어려움속에서도 부모님 덕분에 우리 형제 자매는 굶지는 않았습니다.
가난이 불편하고, 힘들긴 했지만 우리는 행복하게 자랐고,모두들 어려움속에 학업을
마칠수 있었습니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부유한 삶을 동경하거나 스스로 자포자기 한적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 했습니다.
여름 방학때는 농사꾼이 되어야 했고, 겨울 방학때는 나무꾼이 되어야 했습니다.
무전여행, 수학여행, 물놀이 등은 우리들에겐 사치스런 단어 뿐이었습니다
기타치기, 하모니카 불기, 피아노, 당구, 수영, 바둑,태권도 등 취미 활동은 강건너
불보기 였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악기하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습니다. 내 불찰 보다는 그 당시 여건이 그런것을
허용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효도하려 하니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 는 말을 많이 읽었고, 들었고, 배웠습니다
이제 삶의 여유를 찾고, 모두들 성장해서 크게 여유롭지는 못해도 어려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년을 좀 편하게 쉬셔야 했는데, 부모님은 우리들의 늦은 효도를 기다리지 못하셨습니다.
손자, 손녀들 결혼식도 보시면서 새로 태어나는 귀여운 아가들의 웃음소리도
들으셨어야 하는데... 증손자,손녀는 그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제 스스로 위안을 삼는것은 자주 충주에 가서 이곳 저곳 부모님 모시고
풍경 좋은곳도 보여드리고, 식사도 사드린것이 큰 위안이 되였습니다.
수안보 온천탕에도 꼭 갈때마다 함께 모시고 가서 등도 밀어 드리고
한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늘 "고맙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머물고 있답니다 당연히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인데
고마울게 있겠습니까?
부모님 떠나신후 가끔 꿈속에서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아니 나타 나셨습니다,.
일상처럼 부모님과 밝게 생활하는 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선뜻 놀라
눈을 뜨면 현실이 아닌 꿈이였지요. 순간이나마 너무 행복해 보여서 좋았답니다
꿈의 정체는 아직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지만 참 영혼의 세계는
궁금하기만 합니다.풀수 없는 미스테리 입니다.
그런 세월이 흘러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며칠 후 아버님 제사를 모셔야 합니다
옛날 같으면 3년상을 치루었기에 첫 제사는 소상이라 하여 큰 행사였습니다
어릴적 동네에서 소상(小祥), 대상(大祥) 치루는것을 많이 보아 왔기에
그 기억이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장례에 버금가는 행사를 하는집도 있었습니다.
3년상을 치루어야 탈상을 하였지요.
저는 본적이 없지만 3년간을 묘소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 하시는 분도 계셨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렇게 할수는 없지요.
아버님 기일날, 젯상 차려 놓고 술 한잔 따라 올리면서 온 가족이 모여 옛 아버님에 대한
고마움과 하늘나라에서 어머님 만나 걱정없이 사시기를 기도 드리는것이 주 목적
이지요. 산소도 찾아 절을 올리고, 추석전 날을 잡아 온 형제,자매가 첫 벌초도 해야 하니까요.
지난 어버이날 찾아 뵙고 아직 산소에 들리지 못했답니다. 형님께서 충주에 계셔서 자주 가 보셨
겠지만 이번 장마비에 별 문제는 없는지, 잡초가 너무 무성해서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첫 제사.
정성껏 진실된 마음으로 형제,자매가 모여 아버지 제사 잘 모시겠습니다
아버님, 우리보러 그날 하늘나라에서 내려 오셔요. 기다리겠습니다
어머님도 모시고 오셔요.손잡고 노래 하며 오셔요.
새로 태어난 손자도 보시구요.동네도 한 바퀴 돌아 보셔요.
아버지---, 언제 불러도 가슴이 짠하게 울렁입니다.
(충주호사인암)